인물론(79) 進退의 時期를 아는 진정한 賢者

미래를 통찰하고 토사구팽을 예고한 달관의 정치가, 경탄의 지략가 

범려(范蠡-BC.536~BC.448년 추정)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정치가, 책략가로 자는 소백(少伯)이며 원래의 출생지는 초(楚)나라의 완지로 알려졌고 초나라의 완탁 또는 오호의 언덕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며, 자기 고향에선 미치광이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대부 문종의 눈에 띄어 월나라에서 구천(句踐)을 섬겼다.

월절서(越絶書-중국 후한의 원강(袁康)이 지었다고 알려진 책으로 고대 오와 월의 흥망을 기록한 역사서)에는 초나라를 섬기던 문종(文鍾)의 눈에 띄어 초나라에 출사했다가 관직을 버리고 오나라에 출사하려고 했는데, 오나라는 오자서(伍子胥)가 있기에 월나라로 가서 구천을 섬겼다고 나온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원조로 이를 언급하면서 흔쾌하게 떠났기에 정작 자신은 토사구팽을 피할 수 있었다.

가장 처음 등장한 것은 오(吳)와 월(越)이 처음으로 맞붙었을 때, 당시 오나라의 상황을 보면 합려(闔閭)가 즉위한 이후 오자서와 손무(孫武) 의 활약으로 초나라의 수도까지 강탈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신포서(申包胥)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병한 진나라의 지원군과 국가가 빈틈을 노린 월나라 왕 윤상의 기습 및 동생 부개가 일으킨 봉기에, 의해 후퇴해야 했으니 춘추오패의 하나였던 초나라를 멸망시킬 뻔하기도 했으니 그 기세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거기에 자기 나라를 공격, 했던 윤상이 죽고 구천이 즉위하니 나라가 안정적이지 못한 때에 월나라를 쳐야 한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사기』에 따르면 이때 범려가 월군 내에서 결사대(決死隊)를 선발하여 그들을 오군, 진영 앞에 보낸 후 일제히 목을 찔러 자살하기를 몇 번에 걸쳐 반복하다가 돌연히 오군을 공격하게 하는 기책을 내어 절대 우세에 있던 오군을 격파했다. 『삼국지』에서 태사자가 북해의 포위망을 뚫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계책,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은 오왕 합려는 중상을 입고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한 후 죽음에 이른다.

구천은 이 전쟁에서 오나라를 격파한 것에 자만하여 장작 위에서 누워 자며 구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오왕 부차를 얕잡아봐 범려의 충고도 듣지 않고 정병 3만으로 오를 공격했다. 그러나 도리어 부초에서 부차에게 대패한 후 회계산에서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에 범려는 구천을 구하기 위해 오의 대부 백비(伯嚭)를 뇌물로 매수하고 부차에게 미녀들을 바쳐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구천은 오로 건너가 부차를 섬기게 되고 범려가 그를 수행했다. 부차는 구천을 석실에 가두고 치욕스러운 마부 노릇을 강요했다. 부차는 범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했지만 범려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구천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던 중 부차가 병에 걸리자 범려는 구천을 설득해 부차의 대변을 핥게 하는 엽기적인 행동까지 불사하게 한다. 부차의 병이 쾌차할지의, 여부를 알아본다는 명분이었지만 부차의 환심을 사고 구천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부차는 자신의 변까지 핥아가며 아부하는 구천에게 넘어가 버렸고, 건강을 회복한 뒤 구천과 범려를 월나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월나라로 귀국한 후, 구천은 부차에게 복수할 날만을 다짐하며 쓴 쓸개를 곁에 두고 맛보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한편 범려는 구천에게 각종 부국강병책을 제안했고 구천은 이를 받아들여 월은 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범려는 오의 국력을 약화할 속셈으로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라는 미녀를 부차에게 바치고 부차로 하여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주색에 빠진 부차는 잇단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오의 국력은 갈수록 약화 되어 갔다. 

몇 년 후, 부차가 제나라를 공격하려 대군을 이끌고 간 틈을 타 구천은 오를 기습해 부차의 태자를 죽이고 오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부차는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 약해진 구천은 순간 망설였지만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에 자신을 살려줬기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는지 백호의 장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한다. 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한다. 구천은 부차를 죽인 후 여세를 몰아 북상하여, 여러 제후들을 소집해 패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부차가 아버지 합려의 원한을 갚겠노라고 장작 위에서 잠들면서 다짐하다가 기어이 성공시킨 것과 또 구천이 그에 대한 원한을 쓸개를 핥아가며 잊지 않고 이뤄냈다는 복수의 연쇄 선상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20년간 구천 밑에서 봉직하며 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등 공신인 범려이지만, 마냥 충신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나라 부차를 꺾은 후 범려는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그의 영화가 극에 다다랐다고 모두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범려의 생각은 달랐다.

“지나치게 큰 명성을 얻으면 다른 사람의 질투와 원한을 사고 일신이 위태롭게 된다. 그런 자리에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구천은 어려움은 같이할 수 있어도 안락함은 함께 할 수 없는 위인이다.” 이렇게 생각한 범려는 완곡히 사임의 뜻을 구천에게 전한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월나라의 반을 그대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으니 제발 사임만은 하지 마시오.”하고 구천은 극구 말렸다. 범려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나라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그냥 남아 있다가는 어떤 화가 닥칠 줄 모른다. 범려는 귀중한 보물을 챙긴 후 가족을 이끌고 월나라를 탈출한다.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구천이 모든 것을 이룬 후에는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아는 신하들을 죽일 것이라 예상하여 미리 잠적한 것이다. 

잠적하기 전 대부 문종에게 “월왕은 어려움을 함께할 수 있어도 부귀를 함께 누릴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니 대부께서도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십시오.”라고 충고했지만, 문종은 그 이야기를 옳다고 생각했으나 당장 월나라를 떠나지 않고 그냥 머뭇거리다가 결국,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고 구천이 보낸 칼로 자살을 강요받는다. 문종의 운명은 범려의 예상대로 최후가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안되어 구천도 병으로 죽고 월나라는 쇠약해져 버렸고, 초 나라에 멸망 당하면서 월나라 왕족도 거의 전멸당해 그 방계 혈족들은 고씨로 성을 바꾸고 살게 된다. 

구천에게서 벗어나 잠적한 범려의 이후 행적은 수수께끼와 같은 베일에, 싸여있으나 『사기』에 의하면 그가 제나라로 도망쳐 자신의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망명자로서 자기 자신을 내버린다는 뜻)로 고치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거부가 된 범려의 재능을 알아본 제나라 왕이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범려는 모은 재산을 모두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홀연히 또 잠적해 버렸다. 치이자피라는 말은 오나라의 공신이었으나 결국 모함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오자서의 시신이 말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에 담겨 물에 던져진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제나라의 상경 벼슬을 얼마간 하다가 높은 자리에 오래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제나라를 떠났다고도 한다. 이후 범려는 도(陶-현재의 산동성 허쩌사 딩타오현)라는 곳에 갔는데 그곳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범려는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해 거부가 되었고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양생장수(養生長壽)의 지도와 한의학에 통달했다고 한다.

도주공 시절 알려진 일화가 있는데 그의 차남이 초나라에서 살인을, 하여 사형을 당할 처지에 있었다. 이때 범려가 말하길 “살인을 했으면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천금을 가진 부자의 아들은 길거리에서 죽지 않는다.” 그는 막내아들에게 거금을 주어 초나라에 보내려고 했는데 장남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목숨을 걸고 간청하기에 장남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남은 구명에 성공하지 못하고 동생의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 어머니와 모든 마을 사람이 슬퍼했으나 범려는 혼자서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큰아들이 동생을 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갖은 고생을 다 해봤기 때문에 좀처럼 돈을 쓸줄 모른다. 반대로 막내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하게, 어려움 없이 자랐기 때문에 돈 모으는 고통을 모르고 돈을 잘 쓴다.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은 막내라면 거기 가서 돈을 크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게 결국 동생을 죽이게 된 거다.”

여기서 ‘천금지자 불사어시(千金之子 不死於市)’라는 성어가 나온다. 

그러나 치이자피나 도주공의 이야기가 과연 범려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또 절세 미녀 서시와의 러브스토리도 유명하지만, 과연 이게 진실인지도 의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범려는 초절정 엘리트이자 엄친아가 틀림없지만, 중국인들이 범려와 여타의 이야기들을 섞어서 희대의 엄친아를 창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범려가, 치이자피나 도주공으로 불린 뒷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내용이 다소 뜬금없는 기타의 전설들과는 달리 당대에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진 채 전해 내려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더라도 범려가 엄친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범려가 처음으로 월에서 공을 세우는 합려와의 전투에서 언급된 ‘기책’에 대해서는 『사기』 등의 역사책에서는 결사대를 자살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틈탔다는 내용을 제외하면 별다른 설명이 없는데 명대 소설인 『열국지』나 진순신의 소설 『십팔사략』 등에서 이에 대한 극적인 내용을 창작하여 보충한 것이 바로 ‘사형수 부대’ 이야기다.

먼저 사형수들로 이루어진 특공대를 조직해서 그들에게 적의 진지 앞에서 자결하면 그들을 전사자로 처리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지만 자신들이 자결한다면 전사자로 처리가 되어서 가족들에게도 전사자의 가족이라는 대우가 돌아간다는 이야기에 사형수들은 앞을 다투어 특공대로 가겠다고 했고, 범려는 이러한 특공대를 여럿 만들어서 오나라 진지로 출동시켰다. 오나라 진지에서는 갑자기 적들이 나타나자 경계를 했지만, 적군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자결을, 하자 놀랐고 이러한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아예 정신 줄을 놓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되자 이번에는 진짜 특공대가 오나라 병사들에게 달려들었고 그러한 자살소동을 벌이는 와중에 월나라 병사들이 오나라 군사를 양쪽에서 소리 없이 포위해서 들이닥치게 되자 오나라는 혼란에 빠져 대패를 하게 되고 합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죽게 된다. 원전인 『사기』에서는 평범한 병사였던 이 결사 대원들을 소설에서는 사형수로 각색한 것이다. 

범려는 정치인으로 성공을 하였고 후반 경제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큰 성공을 한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중국인으로부터도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인들이 범려를 흠모하는 요인은 오나라의 부차를 멸망시킨 재상으로서의 뛰어난 능력과 더불어 후반의 경제인으로서도 엄청난 재산을 모은 재능 때문이다. 중국인 특유의 현실감각은 범려처럼 수만의 재산을 모으고 서시 같은 미녀를 취하여 일생을 즐기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범려와 서시 간의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이야기들이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은 이와 같은 중국인의 세속적인 현실 욕에 기초한 심리적 요인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이 극에 다다르면 화가 미칠 수 있다. 라는 자각 의식이, 범려에겐 몸에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성공의 순간, 거액의 재산 축적의 순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변신할 수 있는 범려의 처세야말로 실은 그 앞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심의 향배를 지극히 깊은 곳까지 체득한 인물인 범려가 펼친 그런 세계가 사뭇 교훈적이면서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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