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 최정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경남=뉴스프리존]김회경 기자= “사상과 역사, 문화의 물줄기는 혼합돼 흐르고, 그 과정에서 더 큰 물줄기를 만들어 새롭게 문명의 큰 바다로 흘러든다”

기고자 현암 최정간은 “19세기 한국사상사연구에 있어서 최대 뜨거운 이슈는 동학과 서학의 만남”이라며, 이 같이 강조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서학의 누구와 만남이 이뤄졌는지를 찾아 나선 지도 어언 30년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전문 연구자는 아니지만 동학후예의 한사람으로서 국내외 고문서 보관소 등지에서 많은 자료들을 열람해보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동학 100년을 맞아 졸저 ‘해월 최시형가의 사람들’을 통해 동학의 수운 최제우(1824-1864)와 서학의 토마스 최양업 신부(1821-1861)와의 만남을 발표한 바가 있다.

그 후 필자는 최양업 신부의 영남알프스일대 유적지 현장답사를 집중적으로 해봤다.

그 결과 수운이 1855년 2월 울산 유곡동에서 받은 을묘천서(乙卯天書)는 최양업 신부가 준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는 개연성에 도달했다.

1849년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영남의 동래와 울산(영남알프스지역 교우촌) 집중선교를 하고 있었다. 최양업이 관활한 천주교 공소가 15개소나 됐다.

1850년경에는 신라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 기도처인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백운산(열박산) 아래 상선필 교우촌과 경주 산내면 진목 교우촌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양업의 울산지역의 집중 선교시대와 수운의 울산 유곡동 시절과 겹치기 때문에 두사상가의 만남의 개연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기 전 위기에 처해있는 조선민중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온갖 고행을 다했다.

그는 한때 서학의 방법론을 가지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해답을 찾으려고 서학의 많은 부분을 접했다. 특히 그의 저서 ‘동경대전’ 중 여러 부분에서 서학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천도교회 쪽이나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최근에는 도올 김용옥은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기 전 1855년 2월에 받은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서술한 ‘을묘천서’가 서학의 마테오리치가 1603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천주실의’라고 주장해 더욱 논쟁을 뜨겁게 하고 있다.

천도교 내에서도 표영삼, 성주현 등은 ‘을묘천서’가 ‘천주실의’가 분명함을 밝히고 있다. 오래전부터 경주 해월 집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수운이 동학 창도 이전에 울산 쪽에 살다가 동래부근(지금 부산)에서 서학을 하는 경주 최씨 성을 가진 사람과 담론도 하고 매우 가깝게 지내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천도교창건사’나 ‘시천교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고 있다.

필자는 해월 가의 아득히 묻혀 있는 구전을 발굴하고자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관계 자료들을 추적해 봤다. 그 중에서도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여명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최양업 신부를 주목하게 됐다.

필자는 수운이 동래 부근에서 만난 서학하는 경주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을 최양업 신부로 비정하고 그에 관한 사료와 유적지등을 추적 답사했다.

1989년 9월에는 최양업, 최방지거, 김대건 등이 공부한 마카오 신학교 자리도 대외 교섭사의 석학인 고(故) 박태근 박사와 함께 답사도 해보고 그밖에 파리외방전 교회 고문 서철과 영국 외무성 고문 서철 등을 열람해봤다.

서학의 최양업 신부.(사진제공=현암 최정간)
서학의 최양업 신부.(사진제공=현암 최정간)

▶최양업의 생애

김대건 신부가 수선탁덕으로서 사목생활 1년 만에 순교의 영광을 차지한 반면,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조선 반도를 땀으로 뒤범벅이 되면서 뛰며 증언하다가 순사했다.

그는 1850년대 유교의 도그마에 빠져있던 조선왕조의 정치 상황과 조선 민중의 어려운 삶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마카오 신학교 유학생활에서 서양의 철학과 역사 그리고 선진 과학문명을 공부했다.

또 외부세계 즉 마카오 필리핀 마날라 홍콩 상하이 그밖에 중국 각 지방을 돌아보는 등 국제정세에 매우 정통했다.

이때 마카오는 본래 중국땅이었지만 1557년 포르투갈의 조차지가 되어 포루투갈의 동아시아 지방 진출의 관문이 됐다.

프랑스 영국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자 서양 각 국인의 거류인들도 많아져 자연이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들이 동양의 여러 지역을 선교하기 전에 대부분 이곳을 통과하게 됐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도 이곳에 경리부를 두고 맡은 교구의 사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신학교도 설치하게 된 것이다.

최양업은 조선 천주교회사에서 최초로 해외 신학교에 보내진 유학생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서양 학문을 익힌 불멸의 선구자인 동시에 라틴어 불어 중국어에 매우 능통했다.

어려운 카톨릭 교리를 부녀자와 아이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4.4조의 가사체로 만드는 등 초기 카톨릭 교리를 조선에서 토착화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수운이 남긴 한글 가사체인 ‘용담유사’도 4.4조 가사체다.

최양업은 1821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다락골에서 경주 최씨 최영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세살 되던 1836년 12월2일 최방제(방지거), 김대건 등과 함께 한양에서 출발해 만주, 내몽고를 거쳐 당시 포루투갈령인 마카오에 도착해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리보아(Libois)신부의 지도 아래 신학문의 길을 닦았다.

그 후 13년만인 1849년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해 조선 땅 전역을 돌면서 고통 받는 많은 민중들에게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귀국 6개월 만에 조선 남쪽 5도를 순방, 무려 5천리의 선교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가장 남쪽인 영남의 동래지역과 울산의 언양, 두서면 그리고 경주 산내면까지도 선교활동을 폈다.

1960년 9월3일자 최양업 신부 마지막 편지.(사진제공=현암 최정간)
1960년 9월3일자 최양업 신부 마지막 편지.(사진제공=현암 최정간)

▶새로 발견된 최양업의 편지

최양업은 조선에서 선교활동 중에 1849년부터 1860년까지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의 르그레조아(Legregois) 신부와 리보아(Libois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부 대표) 신부에게 라틴어로 쓴 20여 통의 편지를 남겼다.(원래 19통이었는데 1989년 영국외무성의 고문서 보관소에서 박태근 박사가 1통을 추가로 발견함)

최양업의 편지 중 1989년에 새로이 발견된 1853년(철종 4년) 1월23일자 편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온 나라가 온갖 재앙 때문에 흔들리고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 부한 자, 천주교 신자, 비신자, 양반, 서민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항상 입으로는 평화, 평화라고 외치면서 줄곧 놀이와 음주로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다 망치고 있습니다. 왕이란 사람(철종)은 아무런 힘도 없고 누구든지 고관들에게 돈만 많이 바치면 지방관이 됩니다. 우리나라 모습은 왜 이다지 비참합니까! 조선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올바르게 평가할 줄 모르고 인간의 지위와 가치를 오직 세속의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33세의 사제로 목숨을 걸고 귀국한지 4년 만에 전 국토를 순회해본 젊은 사제의 눈에 비친 조국 조선의 모습, 즉 그 정치적 현실과 정신 상황이 너무나 암담했던 것이다.

수운이 득도 이전에 주유천하 하면서 본 조국의 현실도 이와 동일했다. 어떻게 하면 12제국괴질운수에 가득찬 이 나라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수운의 고뇌가 곧 최양업의 고뇌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각자들의 위대한 번뇌가 아닐 수 없었다.

최수운과 최양업의 만남은 19세기 조선 사상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만남이었다.

위기의 조선왕조, 온갖 고통으로 신음하는 조선 민중들을 서학으로 교화시키면서 평등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던 서학의 젊은 사제 최양업, 동학이란 주체적인 역사 인식으로 우리 민족에게 개벽의 빛을 준 최수운, 민족을 구하고자 한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두사람 모두 조선 강토와 백성을 사랑한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사진제공=현암 최정간)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사진제공=현암 최정간)

▶1844년 이후 수운의 행적

1849년 최양업이 입국해 최초로 영남 일대에서 맹렬한 선교활동을 할 때 수운의 행장은 다음과 같다.

1844년 출가구도후 1854년 10월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동으로 정착하게 된다. 1855년 2월 유점사 스님으로부터 ‘을묘천서’를 받는다.

1856년 5월 수운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간 기도에 돌입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수운과 최양업은 이 시기에 울산지역에서 만남이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19세기 중반 조선 사상사의 두 거인은 필연적인 만남을 통해 조선왕조의 현실과 천주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 특히 수운은 최양업을 통해 서양과 중국의 정세 등에 관한 많은 지식을 접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1860년 4월5일 수운이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정에서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동학을 창도했다.

한편 최양업은 경주에서 가까운 울주군 등억산 죽림굴(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대제공소) 교우촌에 머물면서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 상황을 은사인 리보아(Libois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부 대표) 신부와 르 그레조아(Legregois) 신부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최양업의 관할구역인 경주 인근 진목교우촌에서도 교우 13명이 체포돼, 그중 두 명은 서울로 압송되고 한 명은 대구로 이송, 나머지 10명은 경주 감옥에 하옥됐다.

이때 최양업은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최후가 온 것으로 생각. 그의 선생 신부께 불쌍한 조선교회를 부탁하는 하직 인사를 편지로 썼다.

이 편지 내용에는 수운이 동학을 창도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경신박해 시기와 경주와 가까운 언양지역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1860년 9월3일자 죽립에서 발송)

그는 1861년 6월 어느 날 자신이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가던 중 갑자기 장티푸스로 인해 그토록 사랑하던 강토와 민중들과 이별하게 됐다.

현암 최정간
현암 최정간

한편 최수운은 1860년 동학을 창도한 후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포덕에 집중한 결과 그 열매를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에게 전한 후 1864년 3월10일 대구 장대에서 순교했다.

전 생애를 통해 인간애와 평등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던 동학과 서학의 두 거인 최수운과 최양업, 그들의 발자취는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상과 역사, 문화의 물줄기는 혼합되어 흐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더 큰 물줄기를 만들어 새롭게 문명의 큰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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