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의 인과론은 불교의 인과론과 어떻게 다른가?

인과란 무엇일까요? 사전에 보면 원인과 결과, 또는 사람이 평생 지은 선 악간 업(業)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갚음을 받는 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 똑같은 인과론을 주장하면서도 원불교와 불교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문에 시원하게 답해준 글이 있어 널리 알립니다.

윤광일(덕균)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의 <원불교의 인과론은 불교의 인과론과 어떻게 다른가?>를 너무 길어 요약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종교의 시작은 ‘만사가 정당하게 귀결된다.’라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틀린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유대교는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피라미드 축성에 동원된 자신들의 노예 생활에 대한 사필귀정의 의문에서 시작됐고, 브라만교 역시 천시 받는 하층 카스트들의 사필귀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원불교의 정산 종사(鼎山宗師)는 <법훈편 26장>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보다는 정할 정(定)자 사필귀정(事必歸定)이 옳다”고 말했다. 만사가 정당하게 귀결되기보다는 정해진 대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결과를 누가 정하느냐’에 따라 불교 계와 기독교 계로 갈라진다. 기독교 계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즉 하느님이 정한 대로 이뤄진다고 한다.

불교계는 인간의 삶이나 행위를 주로 행위자 자신의 전생 업에 의한 동기론으로 설명한다. 이것이 인과론이다. 물론 기독교(갈라디아서, 6:7)에서도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인과응보를 말한다.

첫째, 불교의 인과론

불교의 인과론은 브라만의 숙명적 인과론에 반해서 “현생의 선 업(善業)에 의해 후생에는 하층 카스트도 상류 카스트로 진화할 수 있다.”라는 미래 지향적인 진화론 적 인과론이다.

〈과거 현재 인과 경〉에 의하면 모든 인(因)은 연(緣)을 매개로 해 과(果)를 맺게 되고, 모든 과는 보(報)를 낳는다. 보는 다시 인에 연속되고, 일체의 존재는 이 인과의 계열 가운데에 있어서 하나라도 독존해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일체의 우연도 없다. 정업은 난면(難免)이다.

 다만, 과보의 시차가 있을 뿐인데, 〈삼세 인과 경〉은 현생의 행위에 대한 과보의 시차에 따라 (1)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순현업(順現業), (2) 다음 생에서 받는 순생업(順生業), (3) 다음 생 이후에서 받는 순후업(順後業)의 삼시업으로 대별 한다.

둘째, 원불교의 인과론

근본적으로 불교의 인과론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원불교의 인과론은 ① 음양 상승의 인과론 ② 순현업 중점 인과론 ③ 찰나 인과론으로 요약된다.

① 음양 상승의 인과론

불교의 인과론에 유교의 〈주역〉, 도교 〈음부경〉의 음양 상승의 도가 합해진 인과론이다. 《원불교 대종경》 <인과 품 1장>에서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生滅)이 없이 돌고 도는지라,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되나니, 이것이 만고에 변함없는 상도니라”고 밝혔다.

곧 원불교의 인과론은 〈원불교 정전(正典)〉 ‘참회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음양 상승의 도를 따라 선행자는 후일에 상생의 과보를 받고, 악행 자는 후일에 상극의 과보를 받는’ 음양 상승의 인과론이다. '음양 상승의 도'는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며 흘러간다.

② 순현업 중점 인과론

불교의 인과가 순생업과 순후업의 관점이라면, 원불교의 인과는 당대에 인과가 성립되는 순현업에 중점을 둔 인과다. 소태산 부처님께서는 <인과 품> 31장과 33장에서 현대는 순현업의 시대임을 예시한다. 원불교에서 소중히 하는 인과는 먼 피안(彼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곳, 이 사람, 이 일, 이 하루, 이 회상 등, 차안(此岸)의 인과다.

③ 찰나 인과론

정산 종사께서는 <한 울안 한 이치>의 ‘제 1편 법문과 일화’에서 ‘심은 대로 거는 찰나 인과론’을 말했다. “인과를 전생, 이생, 내생의 삼세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로 보아야 한다. 찰나 전은 과거요, 찰나는 현재요, 찰나 후는 미래다.

찰나 인과론은 원불교의 현대적 감각을 입증한다. 1980년까지 구리 선을 통해 아날로그 신호를 초당 1쪽 정도를 전달했다. 지금은 ’광섬유 디지털 신호‘로 초당 9만 권의 백과사전을 전송한다.

이러한 초 스피드 시대에는 인과도 찰나 적일 수밖에 없다. 찰나 찰나가 인과의 연속이다. 찰나 찰나에 혈심(血心)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어떻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도 《사십이장경》 38장에서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 쉬는 사이에 있다.”라며 찰나 인과의 가능성을 설 하셨습니다.

원불교와 불교의 인과론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어쨌거나 <인과응보의 진리>는 소소영령(疏疏靈靈) 하며, 무서운 것이 아닐까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1월 16일

덕 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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