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이곳에 체육관을 오픈한지 4반세기를 맞이한다. 그동안 수 많은 회원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중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대표적인 회원 한 분을 며칠 전 상봉했다.

15년 전 어느 날 중년 신사 한 분이 아내와 함께 복싱을 체득(體得)하기 위해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했다. 그는 필자와 입관절차에 관해 몇 마디 묻고 답한 후 대뜸 필자에게 관장님 제가 오늘 던지는 문제의 답을 맞추면 체육관에 곧바로 등록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가 던진 문제는 조선 인조 14년에 청나라가 침입 발생한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 를 말하라 였다. 다행히 알고 있는 문제라 1636년 12월이라고 답을 했다. 이런 코메디 극 같은 인연으로 한국사를 전공한 한민수 회원과 이후에도 쉼 없이 소통하면서 교류를 하면서 지낸다. 

한민수 회원 부부
한민수 회원 부부

각설하고 지난 주말 필자는 남양주시 마석으로 향했다. 70년대 한국 아마복싱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스타 복서이자 필자의 롤 모델 (role model) 황철순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현장에는 1984년 LA 올림픽(8강)과 1985년 서울 월드컵(동메달)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안달호 (부강건설 실장)와 그의 친동생 안주호(구리 농수산물 관리공사 계장) 그리고 1990년 6월 제2회 서울컵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박기홍 (여의도 복싱체육관 관장) 등 황철순 감독의 제자들이 함께했다. 황철순은 1954년 7월 15일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 산악인 엄홍길, 언론인 허문도,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이 탄생한 경남 고성에서 유복한 집안의 7남 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필자가 황 감독과 첫 인연을 맺은 해는 1983년 7월이었다.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된 필자가 훈련했던 장소가 왕십리에 위치한 한국화약 체육관이었고 관장이 황철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화체육관에는 안달호 권채오 박찬목 박수익 등이 황 감독의 조련을 받고 있었고 현재 서울시 체육회에 근무하는 이창환은 중학생이었다.

안주호 계장.황철순감독. 부강건설 안달호 실장(우측)
안주호 계장. 황철순감독. 부강건설 안달호 실장(우측)

현재 황 감독은 10년 전 건강이 좋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1남 3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이곳 남 양주시 마석 에서 아내와 단둘이 칩거하고 있었다.

황철순 감독의 아내분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여자배구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주역인 정순옥이다. 만찬을 하면서 필자가 두분 (황철순 정순옥)은 1979년 5월 26일 오전 11시 엠베서더 호텔에서 최재구 당시 공화당 소속의 동국대 총동창회 회장의 주례로 올린 사실을 말하자 정순옥 여사는 신기한 눈빛으로 필자를 바라본다.

현미 윤미 진숙등 3명의 따님과 아들 동민이의 근황을 묻자 모두 출가해서 손주만 6명이라 답한다. 정순옥 여사는 1989년 필자가 용산공고에 복싱강사로 입성 황철순 감독이 이끄는 리라 공고와 대립각을 세울 때 때 종종 경기장에서 뵙던 분이었지만 온화한 성품의 정 여사는 필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숙적 김정철과 일전을 펼치는 황철순(좌측)
숙적 김정철과 일전을 펼치는 황철순(좌측)

여담이지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주포 정순옥 조혜정이 활약한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할 때 전 일본배구팀 감독 다이마쓰 히로부미를 특별코치로 초빙하여 한국팀을 지도 올림픽 동메달 획득이란 개가를 이룩했다.

다이마쓰는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일본 여자대표팀감독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인물이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이른바 황군 출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살아온 사람으로 상상을 초월한 스파르타식으로 선수들을 지도한 배구 감독이였다.

바로 정순옥 여사의 남편인 황철순 감독은 종목은 다르지만 <다이마쓰> 같은 얼음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운 열정을 지닌 전형적인 스파르타식 지도자였다. 그런 그에게 필자가 선물한 닉네임이 복싱판의 마키아벨리였다.

1989년 지도자 원년부터 6년 동안 황 감독에게 후에 WBC LF 급 세계정상에 오르는 최요삼을 시발로 최준욱 백달근등 용산공고 에이스들이 경기에 이기고 판정에 패하는 장면이 속출 분을 참지 못한 필자가 의자를 들어 집어던지는 퍼포먼스를 연출 하는 등 피해의식이 남달랐다.

그때 필자는 링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이 지도자의 지휘능력과 보이지 않는 파워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전문용어로 인탠지블 파워(intangibie power)가 그것이다. 

박기홍 안주호 황철순감독 안달호 김민기(좌측부터).
박기홍 안주호 황철순감독 안달호 김민기(좌측부터).

스포츠 세계에서 코칭 스태프가 강해야 선수 혹은 팀이 강한 법이다. 이건 스포츠계의 불문율이다. 1997년 서울체고로 말을 갈아탄 필자는 황 감독과 4년에 걸쳐 2차대전을 또 벌였다.

무려 10년에 걸쳐 사각의 링을 배경으로 백마고지 전투 같은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서울체고에 근무할 때 황철순 사단의 리라공고 는 달도 차면 기울듯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시 서울체고는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12체급 중 10체급을 석권했다.

당시 서울체고 신귀항 감독의 인탠지블 파워도 무시할수 없었다. 나머지 두 체급은 플라이급에서 배성호(리라공고) 미들급의 김정욱(용산공고)이 각각 차지했다.

그때 황철순 감독이 말했다. 이제 서울체고 단일팀으로 전국체전에 나가라고. 삶에서 희노애락 과 흥망성쇠는 지구처럼 돌고 돈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지난날을 추억해보면 황철순이라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을 깨부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항전했던 그때 그 시절이 내 삶에 가장 행복했던 한 페이지였음을 느낀다. 그래서 황 감독에게 러브 콜 을 보냈고 이에 그가 응답한 것이다.

이번 주 스포츠 산책 주인공 황철순은 배명중에 재학 중인 1968년 뚝섬 에 위치한 동서울 체육관(관장 윤창수)에서 복싱을 수학한다. 

몬트리올 올림픽 찰스 무니와 8강전을 치루는 황철순(좌측)
몬트리올 올림픽 찰스 무니와 8강전을 치루는 황철순(좌측)

그리고 1970년 남산 공전에 입학 뮌헨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신현옥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전환점을 맞이한다. 1972년 제53회 전국체전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주목을 받은 것이다.

천부적으로 물찬 제비처럼 복싱의 4S(Speed Strategy Skill Sence)를 겸비한 황철순은 졸업반인 1973년 제6회 아시아선수권대회(태국) 선발전에서 발레리나처럼 율동적인 스텝에서 송곳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속사포 원투로 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충배를 꺽 는 대이변을 창출 한다. 국가대표로 발탁된 황철순은 본선에서 동메달을 획득한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결승에 진출 북한의 구영조에게 판정패했지만 소중한 은메달을 가슴에 품는다.

도로공사 배구팀의 응원을 받으며 입장하는 프로복서 황철순
도로공사 배구팀의 응원을 받으며 입장하는 프로복서 황철순

1976년 동국대 창단 멤버로 입학한 황철순은 숙명의 라이벌 박인규를 꺽고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는 몬트리올 올림픽 16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마르티네스(쿠바)를 꺽는 대이변을 연출한다.

국내 복싱 사상 최초로 쿠바 복서를 제압한 역사적인 쾌거였다.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를 꺽자 황철순의 고향 생가에는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집결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메달권에서 황철순은 찰스 무니(미국) 에게 3ㅡ2로 판정패 고개를 숙인다.

그날이 1976년 7월 28일이었다. 그날 박찬희와 최충일도 모두 메달권에서 석패 7월 28일 그날은 한국복싱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날로 기억된다. 197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황철순은 북한의 정조웅을 잡고 첫 우승을 차지한다.

6번째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걷어 올린 첫 금메달이었다. 그해 겨울 황철순은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상을 획득한다. 

1977년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 황철순
1977년 대한체육회 최우수선수 황철순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황철순은 그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한 동국대 입학 동기 김정철을 5ㅡ0 판정으로 제압한다. 김정철은 125승(107 KO.RSC) 5패를 기록한 하드 펀처였다.

이 경기는 문성길 허영모전 에 비견될 정도로 팬들의 관심이 증폭된 경기였다. 원조 돌주먹 김정철은 고향 파주에서 작년에 하늘에 별이 되었다. 황철순은 본선에서 무난하게 금메달을 획득했다.

1979년 10월 황철순은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둔 예비고사에서 그의 스피드가 세계무대에서도 통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1980년 그해 황철순은 그해 1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홈링의 찰스 토마스를 잡고 대회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양석진 .김승미감독 황철순 트레이너 이창환 (좌측부터)
양석진 .김승미감독 황철순 트레이너 이창환 (좌측부터)

이어 2월에 개최된 제7회 봄베이 아시아 선수권 대회 마져 우승한 황철순의 아시아에서 적수가 없는 무적함대였다. 3월에 태국에서 열린 제6회 킹스컵대회에서도 케냐의 이코니를 판정으로 잡고 다시 한번 최우수복서로 선정되며 최절정기의 활약을 펼친다. 이제 그에겐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무대인 모스크바 올림픽만 남았다.

그러던 5월 어느날 정치적인 대립 관계로 모스크바 올림픽에 한국은 불참을 선언한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국제대회 금메달 5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 제6회 킹스컵대회와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 최우수선수 황철순은 12년간 176전 167승 9패의 화려한 전적을 남기고 복서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후 프로로 전향 5전 전승을 했지만 곧 접고 1982년 지도자로 변신한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던 황철순은 지도자로도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리라공고와 서울시청감독을 두루 거치면서 유니크 (Unique)한 지도력으로 프로복싱 세계정상에 등극한 변정일과 조인주를 비롯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금메달 이창환과 세계선수권 2회 연속 메달 리스트 신종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김기석 그리고 2012년 런던올림픽 은메달 한순철을 굵직한 대형선수들을 배출 지도력을 인정받는다. 올해 칠순에 접어든 황철순 감독의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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