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리의 눈] 그레이엄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 입문'을 읽고

2007년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워크숍에서 ‘사변적 실재론’ 최초의 심포지움이 열렸다. 그 자리에 이 책의 저자인 그레이엄 하먼을 비롯 브라지에, 그랜트, 메이야수가 있었다. 이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사변실재론은 분화되었고, 이들 네 철학자는 지금은 제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 책은 하먼이 그 역사와 분화과정을 회고와 비판, 비교 성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사변실재론의 기원과 의미, 각 철학자들 간의 입장변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사변적 실재론은 신유물론과 더불어 인류세와 기후위기라는 시대에 ‘철학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라는 물음에 직면하였고, 이에 답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철학적 조류 중 하나이다. 마뉴엘 데란다, 브라이도티, 그리고 베넷과 버라드로 이어지며 최근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신유물론은 물질에 대한 근대적 접근을 비판하면서, 물질의 능동적 힘에 대해 논하고 있다. 반면 사변적 실재론은 오랜 철학적 문제이기도 한, ‘실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은 인간중심적이고 인류예외주의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기후위기의 주범이 인간이라고 할 때 인간중심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은 이러한 새로운 철학적 사조들에게서 새로운 윤리-인식-존재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다만 초기의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입장을 강화시키면서 사변적실재론에서 멀어져갔다. 초기의 워크샵 이후 메이야수는 실재론보다는 유물론을 더 강조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모임에는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브라지에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명칭을 고안했음에도 그 명칭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하먼에 따르면 더 이상 사변적 실재론이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입장들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초기의 사변적 실재론자들 또한 최소한의 의미에서 사변적 실재론자들임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사변적 실재론은 매우 낯선 개념이다. 특히 ‘실재론’이 이들 철학자들에게서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변적 실재론을 이해하기는 다소 난해하다. 예를 들자면, 브라지에는 일반적으로 관념론자로 알려진 버클리를 실재론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변적 실재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실재론자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냐에 더 집중해야할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 입문' (표지제공=갈무리출판사) 

따라서 하먼이 사변적 실재론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으로 사변이란 대개 경험적 연구와 반대되는 반성적 사유과정을 일컫는데, 이 책에서 하먼은 사변적이란 말을 “직관에 반하거나 심지어 아주 기묘한 것처럼 보이는 결론에 이른다는 의미”(24쪽)로도 사용하고 있다. 또 실재론이란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마음과 독립적인 세계의 현존을 신봉”(20쪽)하는 이론이지만, 하먼은 그런 정의만으론 부족함을 강조한다. 하먼에게 실재란, 인간의 마음과만 관계맺는 것이 아니다. 하먼은 인간 마음과 맺는 관계들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비인간 객체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더 강조한다. 전통적 실재론은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전체 세계와 맞세울 정도로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하먼의 실재, 즉 객체들은 인간의 어떤 지식이나 접근으로도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잉여, 즉 실재성을 가지는 어떤 것들이다. 때문에 하먼은 메이야수나 브라지에 같은 ‘철학을 과학의 시녀’로 만드는 과학주의적 경향을 크게 반대하며, 오히려 미학주의적 접근이 더 원초적인 만남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하먼은 자신의 ‘객체지향 존재론’에 관해서도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하먼은 왜 지금은 더 이상 사변실재론에 속하지 않는 과거 동료들까지 묶어 사변실재론 입문서를 쓴 것일까? 우리는 하먼이 “입장의 다양성은 언제나 사변적 실재론의 최대 강점”(419쪽)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을 더 의미있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하먼의 관점에선 이들은 사변실재론의 출발, 즉 인간중심적이고 상관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메이야수는 다시 상관주의자로 되돌아가버렸다곤 하지만.

이들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눈다. 과학(수학)/형이상학, 사고/존재라는 축이다. 메이야수는 수학, 그리고 브라지에는 과학적 시각이지만, 하먼과 그랜트는 형이상학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축은 사고/존재(객체지향존재론은 감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라고 일컫는다)라는 축이다. 즉 사유와 세계의 지식을 과학혹은 수학을 통해서 획득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지식은 직접적으로 획득불가능하다고 보는 형이상학적 입장이다.

이 책은 사실상 하먼의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요 당사자의 입장에서, 초기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토론과 논쟁이 진행중인 ‘현장’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큰 장점이고 매력이다.  하먼을 통해 이들 철학자들이 더 이상 사변적 실재론에 묶이기를 원하지 않게 된 이유와 더불어 명료하게 잘 정리된 그들의 입장과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책은 각 철학자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주의(브라지에), 생기적 관념론(그랜트), 객체지향존재론(하먼), 사변적 유물론(메이야수)이다. 브라지에는 실재의 문제에 대해서 허무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먼은 객체들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무언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브라지에의 인식론적 구분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실재성을 지각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먼이 주장하는 존재론은 브라지에가 의문을 갖고 있는 평평한 존재론이다. 브라지에는 어떻게 야훼와 동정녀마리아를 플로니스톤과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지 묻는다. 하먼이 객체지향철학을 표명하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와 플로지스톤이 동등한 객체성을 가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랜트의 철학은 객체-지향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랜트는 개별적 실체를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먼에게는 개별적인 객체들 너머에서 발견되어야 할 심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이야수의 목표는 실재론 형식의 절대적인 것을 획득하는 것”(339쪽)에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건 말건 현존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이를 위해 지나치게 수학을 물신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변적 실재론은 주객 이분법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학문을 정립하려는 현상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후설에게 우선하는 것은 분명 ‘객체’이다. 다만 그 객체는 여전히 의식에 속하는 것이기에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을 통해서 드러나는 실재적인 객체는 아니다. 하먼은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접근의 철학이라 부르며, 이들 현상학이 여전히 인간세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렇기에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의 입장은 후설의 지향된 객체가 아니라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대표된다. 하먼에게 실재는 인간외의 객체들, 인간을 제외하고 말해질 수 있는 객체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통철학에서의 관념론과 실재론의 논의를 넘어선 새로운 실재론, 즉 사변적 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객체지향존재론자에 속하는 샤비로, 레비 R. 브라이언트, 그리고 티모시 모턴의 이야기가 빠져있다(조만간 나올 다른  책에서 이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먼은 자신이 이들 세사람과 견해가 같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변적 실재론 입문이 ‘객체지향존재론’에 관한 책이 아니기에 이들 세 사람과 사변적 실재론자들과는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하먼이 조심스럽게 밝힌 것처럼 사변적 실재론 입문은 다양한 논의들을 첨예하게 비교 분석하기보다는 이들의 다양한 이 입장을 위한 개론서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충분하다. 한국에서도 기후위기 문제와 더불어 신유물론에 관한 논의가 활기를 띄고 있고, 동시에 실재성에 대한 관심도 새로운 관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들 학자들의 이론에 따라가기보다는 이들이 어떤 관점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하는지를 살펴보면서, 한국사회에서의 담론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힘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심귀연(경상국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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