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한통 의 전화가 걸려왔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홍성식 고창 복싱협회 전무였다.

고창군 복싱협회 3.4대 회장 이. 취임식이 고창군에서 개최되니 참석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부랴 부랴 현장에 도착하니 대한복싱협회 전무를 지낸 조철제 원로회 회장을 비롯 올림픽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김승미 감독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 세계챔피언 출신의 장정구 문성길. 전(前) 방글라데시 국가대표 이용선 감독이 동반 참석 자리를 빛내줬다. 필자를 초청한 홍성식 전무와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12월 국가대표에 발탁된 홍성식이 1994년 11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6년간 대표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소식을 접한 88 프로모션 심영자 회장이 문성길과 김용강이 현역에서 은퇴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차세대 챔피언으로 홍성식을 낙점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필자가 밀사로 파견 그의 원초적 스승인 송상기 관장과 함께 서울 모처에서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델라 호야와 올림픽 4강전에서 타격전을 펼치는 홍성식(좌측)
델라 호야와 올림픽 4강전에서 타격전을 펼치는 홍성식(좌측)

비록 스카웃 에는 실패했지만 그런 인연으로 홍 전무와 필자가 한세대에 걸쳐 교류하며 지내는 전환점이 되었다. 지난 일이지만 홍성식이 프로행을 거부하고 교사직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왜냐면 프로 세계에서 불규칙적으로 들어오는 목돈보다는 적은 돈이지만 일정하게 들어오는 적은 돈의 위력이 훨씬 더 위력이 크다는 걸 현장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홍성식이 탄생한 인구6만의 고창군은 미당 서정주를 필두로 인촌 김성수, 대한 체육회장 이연택, 국무총리 진의종, 녹두장군 전봉준, 판소리 명창 김소희 등 현대사에 영욕이 점철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고장이다. 1967년 11월 13일 이곳 고창에서 탄생한 홍성식 전무도 이분들과 더불어 고창이 배출한 자랑스런 세븐 스타 (Seven star)중 한 명이다. 

고창 복싱협회 이취임식 단체사진(정중앙 조철제회장)
고창 복싱협회 이취임식 단체사진(정중앙 조철제회장)

홍성식의 복싱은 성경 말씀처럼 시작은 미비했으나 끝은 창대했다. 1985년 2월 학생 신인대회에서 밴텀급 결승에서 김이성에게 판정패를 제6회 회장배 대회에서는 8강에서 정양식 에 3회 RSC패를 당한 평범한 복서였다.

졸업반인 1986년 3개 대회 연속 1회전에서 탈락한 홍성식은 마지막 대회인 전국체전(페더급)에서 극적으로 동메달을 걷어 올려 이를 발판으로 서원대에 진학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선발전(페더급)에서 박윤섭 (동아대)에 패해 탈락한 홍성식은 그해 12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당시 대표팀 김승미 감독을 만나 복서로 꽃을 피운다. 홍성식과 김승미 감독의 만남은 수어지교(水魚之交) 즉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과 물고기의 만남이었다.

장정구챔프 이용선 상임심판위원 홍현 관장(좌측부터)
장정구챔프 이용선 상임심판위원 홍현 관장(좌측부터)

1990년 9월 제6회 월드컵대회 8강에서 소련의 강호 아만바 예프를 군말없는 판정으로 잡고 동메달을 획득한 홍성식은 스타탄생의 스펙터클 (Spectacle)한 서곡을 울린다.

탄력을 받은 홍성식은 1990년 제2회 서울컵 1992년 제3회 서울컵 대회(라이트급)를 연달아 석권하며 2연패를 창출 한다. 1991년 이흥수 사단이 상무에 배속되어 크레이지 모드가 한층 강화된 홍성식은 1992년 바로 셀로나 올림픽에서 비록 4강에서 미국 대표인 델라 호야에게 11-10 한 점 차로 석패 했지만 소중한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KBS 방송 해설위원인 노병엽 선생은 귀국 환영식에서 홍성식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면서 네가 진정한 챔피언이다. 라는 격려의 말을 던졌다. 홍성식이 진정한 올림픽 금메달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해 9월 세계 군인선수권대회에서 4연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한 홍성식은 1993년 제1회 동아시아 대회 결승에서 북한의 이영호를 2회 KO로 잡고 국제대회 4관왕 달성에 성공한다. 당시 홍성식의 전력은 이승배 (미들급) 와 함께 천하무적이었다.

하지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출전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출전하기 열흘 전 천둥 치는 운명처럼 지금의 아내인 장정현 여사를 만나 불운 (?) 하게도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비틀거리면서 영혼 이탈되는 참사를 겪는다.

결국 본선 1회전에서 연체동물처럼 허우적거리다가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역설적으로 보면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맞바꾼 장정애 여사와 금쪽같은 만남이었다. 

조규남 이용선관장 백상현 챔프(좌측부터)
조규남 이용선관장 백상현 챔프(좌측부터)

행사장서 만난 조철제 회장과 전(前)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 두 분은 70년대 한국 아마복싱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당시 대한복싱협회 전무를 지내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치에 있던 조철제 전무가 70년대 가장 위대한 복서로 손꼽은 복서가 바로 유종만이었다.

한국복싱사상 최초의 고교생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유종만은 1972년 뮌헨 올림픽 8강에서 유럽 선수권자인 폴란드의 블라진스키 에게 선전 끝에 억울하게 3-2로 판정패를 당한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페더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그해 12월 아시아 올스타로 선발되어 미국 네바다주에서 북미 선수들과 대항전에서 3연승을 거두며 기염을 토했다. 그해 유종만은 대한복싱협회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었다. 또한 그는 MBC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 스타 10인에 조오련(수영) 차범근(축구) 박인실(배구) 홍수환(복싱) 백옥자(투 포환)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탄력을 받은 유종만은 1975년 제1회 킹스컵 대회 제7회 아시아선수권대회(요꼬하마). 1977 년 아시아선수권 (자카르타) 대회를 차례로 휩쓸었다. 유종만은 1973년 체중조절 실패로 충격적인 1패를 당한 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선발전에서 복병 최충일에 패 할때까지 3년 동안 기록적인 49연승 신화를 창출한 복서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1980년 제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조규남(원광대)과 1957년 고창 출신으로 프로복싱 jr 웰터급에서 챔피언을 지낸 백상현 챔프도 참석했다.

성남제일 체육관에서 이동춘 관장의 지도를 받으며 1978년 11월 프로에 대뷔한 1957년 백상현은 김득구 (동아)를 1978년 mbc 신인왕전 4강전에 꺽고 우승을 차지한 이 종실을 2차례나 제압한 실력파였고 1981년 박태훈을 10회 판정으로 꺽고 한국 JR 웰터급 정상에 오른 복서다.

조철제호장과 유종만교수(좌측)
조철제호장과 유종만교수(좌측)

1982년 4월 동양 JR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김상현에 12회 판정패를 당한 후 링을 떠난 백상현은 현재 정읍시에서 홍어 요리 전문점인 홍어나라란 간판을 내걸고 아내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한편 조규남은 복싱 사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신준섭과 함께 원광대학(1982년)에 입학한 복서다.

1961년 군산 출신으로 전북체고 2학년 때인 1980년 2월 제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다. 상승세의 물결을 탄 조규남은 그해 김명복 박사배와 1981년 학생선수권을 휩쓸며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이런 이력을 지닌 그는 이현주 고희룡 권현규 김기택 전 칠성 등과 함께 국내 라이트급에서 춘추 전국시대를 구축한 파이터였다. 당시 필자를 비롯한 당시 전북 대표선수들을 조석인 회장 휘하에서 지도 감독했던 이용선 당시 전주 전광 체육관 관장과 함께한 조규남의 모습을 보니 흩어진 추억들이 소환되어 잠시 지난날을 회상해 보았다. 

홍성식고문 김승미 감독 홍전무 아내(좌측부터)
홍성식고문 김승미 감독 홍전무 아내(좌측부터)

이용선 관장은 필자가 81년부터 83년까지 전북 대표로 활약 할 때 김재봉 강월성 감독을 비롯 필자를 지도한 은사님이다. <FABA> 국제심판을 지낸 이용선 관장은 칠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변함없는 복싱 사랑을 가슴 한켠에 순수하게 간직한 지도자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선발전에서 이창길과 일전을 치뤘던 이용선은 그해 49회 전국체전(라이트급)에 전북 대표로 출전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용선은 동생 이용장과 형제 복서 형제 심판위원으로 유명하다.

황규관 신임회장과 임개환 전임회장(좌측부터).
황규관 신임회장과 임개환 전임회장(좌측부터).

동생인 이용장은 1980년 제61회 전국체육대회(밴텀급) 결승에서 1979년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 우승자인 김평국(경남)을 꺽고 우승을 차지한 복서다. 이들 형제는 슬하에 4명의 따님을 두었는데 이용장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의 따님은 연세대학을 졸업했고 이용선 관장의 3명의 따님은 모두 전북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한 재원들이다.

형제가 전국체전 복싱메달리스트로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는 경우는 천흥배 천인호 형제 복서와 함께 이용선 이용장 형제가 유이한 존재다. 행사가 끝나고 홍성식 전무와 황규관 회장은 이날 생일을 맞이한 복싱 대통령 장정구 챔프에게 생일파티를 마련해 주었다.

고창에서 버섯요리 전문점을 운영하는 황규관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제2의 홍성식 선수가 배출 할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황규관 고창복싱 협회 회장과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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