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에 미 6사단 화순탄광 접수 후 노동자 100여명 해고
노동자들 생활보장 요구하며 광주가다 너릿재서 500여명 사상

[전국 =뉴스프리존]김 석 기자= 우리나라 국민들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게 된 것도 그리 오래지 않았고 현재에도 이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래도 그나마 5.18민주화운동은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주요사건으로 다루다 보니 이제는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이다. 

화순탄광민간인학살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
화순탄광민간인학살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

그런데 실제로 5.18민주화운동이나 제주4.3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946년 미군정에 의한 화순탄광민간인 학살사건이다. 미군정 시기의 극심한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는 ‘대구 10월 항쟁’과 ‘제주4.3’이 사실상 전부이다. 그 두 사건의 원인과 영향에 대한 설명도 수박 겉핥기식이어서 해방 후 3년간의 민군정의 역사는 비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미군들 일제 부역 관리자들 그대로 채용

화순탄광민간인학살사건의 발단은 1945년 10월경 미 6사단이 대한민국의 전남 지방을 전술부대로서, 보병부대로서 전남을 장악했다. 해방된 줄 알았던 나라에 또 다른 점령군으로 주둔한 미군은 화순탄광을 접수하고 노동조합간부들과 노동자 100여명을 해고한다. 그당시 미군은 한국의 노동자를 적대시하고 대단히 강경하게 대우하였다.

그 당시의 한국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 등으로 자생적 관리 능력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미군은 그것들을 부정하고 과거 일제강점기에 복무했던 관리자들을 그대로 채용함으로써 당시 화순탄광 노동자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국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식량사정이었는데 1945년 10월 쌀의 자유시장화를 미군정이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대지주이거나 최소한 중급 규모 이상의 지주들만이 쌀의 자유시장화에 큰 이익을 보았고 이들 대부분은 일제하에서 식민지 지주제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는 제주 4.3사건, 대구 10월 항쟁의 발단 원인이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몇 개월 만에 쌀값은 수십배로 폭등하게 되었고 결국 미군정은 쌀의 유통제를 통제하고 공출제와 배급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배급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아서 화순탄광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또 다른 식민지 삶이상의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

이에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최저생활임금보장 등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해방 1주년 1946년 8월 15일 새벽에 광주로 길을 나섰다. 화순에서 광주로 통하는 너릿재를 막 넘어서려는 순간 미군이 총과 탱크를 앞세워 길을 막았고 그것이 화순탄광 민간인 학살의 시발점이 되었다.

피해자와 유족들에 보상 반드시 필요

이들이 외친 것은 쌀과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광주는 순식간에 생지옥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로 인해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다시 화순으로 돌아가야 했었는데 더 큰 비극은 바로 그때부터 발생했다.

화순 너릿재 옛길.
화순 너릿재 옛길.

“Hubba-hubba”

미군은 짐승몰이를 할 때 쓰는 이 말을 외치며 총검을 휘둘렀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칼로 쏘고 찌르며 이들을 내몰았다. 미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진을 이어가자 미군 군복의 기마경관이 발포하는가 하면, 미군 비행기 6대가 총격을 가했다. 이날 이외에도 화순탄광 노조 간부들을 연행하는 총 4차례에 걸쳐 수십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미군정 체제에서 통치권력이 자행한 화순탄광 학살의 실체는 아직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즉사한 수가 30여명, 부상자가 500여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같은 해 9월에 발생한 총파업의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통치권력에 의한 폭력과 인권유린은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과거사 청산작업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가해국가 역시 명백한 사과와 그 피해자 및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스탠딩뮤지컬 "화순"의 한 장면 =(주)문화공감공존)
스탠딩뮤지컬 "화순"의 한 장면 =(주)문화공감공존)

제주 4·3사건보다 1년여 앞서 일어난 사건인 화순탄광 노동자 학살 사건은 총 3만여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제주 4·3사건의 축소판이자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일어나 최초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미군정 통치하에 발생한 사건들은 그 규모가 축소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역사적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특희 화순탄광학살사건은 미 군정기에 발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미군의 학살 사건임에도 산업전사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되었을 뿐, 화순탄광 희생자들이 겪은 피해에 대한 조사나 정당한 평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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