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가장 비극적 사건’ 

제75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지난 4월 3일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봉행됐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무고한 4·3 희생자들의 넋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했다.

묵념이 끝난후 한 인사가 추념식장에 난입해 한덕수 국무총리와 셀카 촬영을 시도하자,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이를 막아서고 있다.
묵념이 끝난후 한 인사가 추념식장에 난입해 한덕수 국무총리와 셀카 촬영을 시도하자,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이를 막아서고 있다.

그러나 당일 4·3 추념식에 윤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통령실이 밝힌 윤 대통령 불참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하고 프로야구 개막식 시구를 하는 등 취임 후 세 차례나 서문시장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3.1절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을 발단으로 서북청년회등의 극우단체의 과잉진압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희생당한 사건이다.

희생자의 많은 수(약 78%)가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이 중에는 어린이·노인·여성이 약 30%를 차지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과정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1980년 8월에 이르러서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발표했고, 1981년 3월 내무부는 후속 조치로 연좌제 폐지 지침을 발표했다. 1980년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제12조 3항)과 제6공화국 헌법(제13조3항)에도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했다.

그러나 제주도 진압작전에서 전사한 군인은 180명 내외로 추정된다. 또 경찰 전사자는 14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반대로 4·3사건 당시 희생된 경찰과 군인 및 우익단체원들은 모두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美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공식민원이 끊이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4·3위원회)이 제정·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 수는 2020년 현재 14,532명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수치일 뿐, 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공권력에 의해 살상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4.3특별법’ 서명

2000년 1월 11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4.3특별법에 서명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4.3유족 대표와 제주 시민사회 리더들이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김 대통령의 서명으로 4.3특별법은 비로소 제정·공포되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4월 현역 대통령으로는 처음 제주도를 방문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보리아트연구소가 제주 4·3 75주년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 2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4.3 추념식을 거행했다. 2003년 노 전 대통령의 '제주 4·3' 사과 후 발간된 4·3 관련 서적이 노 전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너럭바위 앞에 놓여 있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보리아트연구소가 제주 4·3 75주년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과 2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4.3 추념식을 거행했다. 2003년 노 전 대통령의 '제주 4·3' 사과 후 발간된 4·3 관련 서적이 노 전 대통령이 잠들어 있는 너럭바위 앞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번 제75주년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을 맞아 퇴임 이후 처음 제주를 찾아 추모했다. 문 전 대통령은 “여전히 4·3을 모독하는 행위들이 이뤄지고 있어 매우 개탄스럽고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최근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4·3사건은 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고 주장하고, 극우단체들이 ‘4·3은 공산폭동’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거는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과 2020년, 2021년 추념식에도 참석했다. 임기 중이던 2021년에는 4·3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기준 등이 담긴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도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통과시켰다.

이승만 정부의 수립으로 제주 4.3사건은 언급 불가의 성역이었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진상 규명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그러나 이듬해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같은 노력이 유야무야되면서 논의 자체가 아예 금기시됐다.

당시 4.3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은 국가권력이 임의적으로 독식했으며, 1967년 국방부는 한국전쟁사를 통해 제주도 남로당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폭동으로 못박았다.

이후 이러한 4.3사건에 비인륜적 역사 퇴행은 1989년 재야운동단체들이 사월제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1회 제주항쟁추모제를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하면서 본격화됐다. 이어 1980년대 후반부터 재야운동단체뿐 아니라 지방의회, 4.3유족회 등 민간단체, 언론 등의 노력이 이뤄지면서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는 성과가 나타났고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가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진상보고서 채택과정에서 4.3사건 관련 용어들도 바뀌었는데 4.3사건 논의가 금기시되던 때 산으로 올라가 투쟁한 사람들에 대해 쓰인 ‘폭도’, ‘산폭도’라는 용어가 ‘무장대’, ‘재산 무장대’로 순화됐다. 또 4.3사건 진압작전에 나선 군‧경 등 우익세력에 대해서는 ‘진압군’, ‘군‧경’이라는 용어가 우익세력 전체를 묶은 ‘토벌대’로 변경됐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서 확정되었다. 발생 55년 만에 4.3특별법에 의해 작성되고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둔 정부 차원의 최초 진상조사보고서로서 의미가 높다.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다뤄 4.3당시 발생한 대규모 인명 학살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극적 계기를 구축했다.

4.3위원회는 역사전문가 뿐만 아니라 국방부와 경찰, 그리고 우익성향을 지난 단체 전문가들까지 참여 2년여 동안 폭넓은 자료조사와 토론을 거쳐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정부차원에서 4.3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대한민국건국희생자제주도유족회 등 제주도내 12개 우익 단체들이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절대 인정 할 수 없다”는 입장의 성명을 밝혀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한다’는 비난을 자초하였다. 이들 12개 단체들은 2003년 10월 28일 지역 일간지를 광고를 통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심히 왜곡 편향된 보고서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바 있다.

이들이 무분별하게 주장하는 내용 대부분이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채 강경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경의 주장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내용은 이미 4.3위원회에서 수십 차례 제기됐으나 역사의 객관적 서술이라는 차원에서 수용되지 않았던 내용에 불과한 것을 재차 부각시킨 것이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의 기록들을 우리나라의 기억을 넘어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제주4.3기록물은 단순히 4.3당시의 기록을 넘어, 4.3 이후 진상규명의 과정과 제주사회의 화해와 상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았다.

제주 4.3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블러그 갈무리
제주 4.3 ⓒ 블러그 갈무리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도내 학계‧시민사회로부터 2012년에서 2013년 사이 공론화되기 시작됐다. 2019년부터는 제주4.3사건과 관련된 문서, 기사, 사진 총 4만9635건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시행, 기록물들을 시대별, 주제별로 분류했다.

국내외로 과거사 해결 사례를 보면, 가해자를 특정하고 처벌하는 과정이 태반이었다. 이로 인해 정의가 구현되는 부분도 있지만, 사회가 분열되는 측면도 분명 상존했다.

그런데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를 인정받은 4.3유족과 제주도민들이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자’고 뜻을 모은 정신도 세계사적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아픈 과거를 딛고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간 제주도민의 위대한 정신을 세계인과 공유하고자 추진되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노력은 전 국민이 합심하여 조속히 구현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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