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퇴행적 역사관이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덮어

유력 정당 전당대회는 거대한 회식 자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라는 말을 생전에 자주 했었다. 현실정치의 역동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였다. 허나 대부분의 정치적 격변은 나중에 곰곰이 곱씹어보면 예측 가능한 변화들이었다. 단지, 상황이 전개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른 까닭에 사전에 예견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2023년 4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는 24일 월요일은 우리나라 제도정치권의 쏜살같은 속도감 앞에선 어떠한 예측과 전망도 무의미함을 다시금 일깨워준 날이었다. 공격하는 진영과 방어하는 세력의 위치가 순식간에 180도로 뒤바뀐 탓이었다.

이날 오후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작년 12월부터 체류해온 프랑스 파리로부터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송영길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 선출한 2021년 5월 전당대회 국면에서 그의 최측근 인사로 알려진 이정근 더불어민주당 전 사무부총장이 다수의 현역 국회의원을 포함한 수십 명의 동료 정치인들에게 거액의 현금이 든 돈봉투를 뿌렸다는 수사 결과가 검찰에서 발표됐기 때문이다.

전당대회를 비롯한 각종 당내 경선에서 돈봉투가 오가는 건 한국정치의 해묵은 관행이다. 이를테면 술잔이 바쁘게 오가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거나한 회식 자리 없이는 치를 수 없는 행사가 대한민국 유력 거대 정당들의 전당대회다. 열성 당원들과 핵심 지지자들이 맑은 정신에 음식점이 아니라 강당이나 회의실에 모여 당의 진로와 노선을 둘러싼 치열하고 건전한 정책토론을 통해 승부를 가리는 일은 정치학개론 속에서나 존재하는 교과서적 풍경일 뿐이다.

전당대회는 단순히 새로운 지도부를 뽑는 기능과 절차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장장 수개월에 걸쳐 펼쳐지는 거당적 차원의 대규모 회식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도덕성은 별로 높지가 않다. 한국 정치인들의 부실하고 마비된 윤리의식을 고려해도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 사건을 대하는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공공연히 묻어난다. 당원들과의 회식에마저 검찰이 무차별적으로 사정과 수사의 칼날을 들이대면 앞으로 무슨 수로 정치를 할 수 있겠느냐의 무언의 항변일 터이다.

이와 같은 정서는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김기현 당대표를 필두로 더불어민주당을 전당대회에서 돈이나 돌리는 부패한 정당으로 맹공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에 진심으로 놀라고 분노한 기색이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

송영길이 민주당에 지른 불 윤석열이 껐다

전당대회 돈봉투와 관련된 여당의 야당 공격은 용산 대통령실을 다분히 의식한 전시성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렇게 열심히 야당과 싸우고 있음을 윤석열 대통령이 제발 알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몸짓이라 하겠다.

국민의힘의 대야 공세에 왜 체중이 실리지 않았겠는가? 정치인들이 당원들과 어울려 밥 먹고, 술 마시지 않으면 기본적이고 원활한 정당운영조차 보장되지 않기는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이 피차일반인 까닭에서이다.

게다가 지인들끼리 단체로 모여서 폭탄주 질펀하게 돌리며 배 터지게 포식하는 낡고 케케묵은 회식 습관에 관해서라면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사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오죽했으면 박영환 경향신문 정치부장이 윤석열 정부를 겨냥해 ‘회식정부’라고 일갈했겠는가?

윤석열 정부의 회식과 더불어민주당의 회식에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박영환의 지적을 잠시 빌리면 한도를 모르는 특수활동비로, 후자는 공천을 대가로 긁어모은 돈으로 각각 회식비를 조달한다는 것 정도다. 신축성과 탄력성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내로남불하는 고무줄 잣대에 근거하자면 국민이 납부한 세금으로 술 마시면 합법적인 착한 회식이, 정치지망생들의 공천헌금으로 술자리를 즐기면 불법적인 나쁜 회식이 되고 마는 셈이다.

우리나라 정당들 특유의 끈끈한 조직문화와 윤석열 대통령의 독특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의 심리상태를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나는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더불어민주당에 실효적 타격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는다.

물론 마땅히 회식비로 써야 할 돈으로 특정 중진 정치인이 남몰래 재산을 증식했다거나, 또는 그 배우자가 값비싼 명품가방을 구매했다면 파장의 크기와 사태의 진행 방향이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정당법이 규정한 인원과 액수를 초과해 회식했다는 불법성보다는, 당원들은 삼겹살 굽는데 정치인들은 소갈비 뜯었다는 이기성과 의리 없음에 민심은 더더욱 격노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검찰은 이 전 부총장이 도처에 나눠준 자금이 실제로 어디에 쓰였는지를 규명하는 데 주력해야만 한다. 만약 당원들의 술값과 밥값 용도로 전액 지출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파문은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송영길 전 대표가 어째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노골적으로 흉내 낼 만큼 태평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인천국제공항 입국심사장에 나타났는지 확인하는 일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유수의 일간지인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우리나라 국민 일반의 보편적 역사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어떤 배경과 동기로 시종일관 굴욕적인 대일 저자세 외교를 고집하는지 필자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국민의 공분을 확실하게 부르고 있는 충격적 대목은 윤석열이 일본 총리의 입에서 나와야 어울릴 궤변과 억지를 다른 나라 국가원수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수시로 무분별하게 발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와 민생에 관해서 문외한 수준으로 평가되어온 윤 대통령은 외교와 국제관계에 대해서는 가히 백치에 가까운 단견과 몰상식을 거의 연일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검찰이 회심의 국면전환용 승부수로 꺼내 들었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카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에 의해 이렇게 조기에 신속히 진화되고 있다. 윤 대통령 부부가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귀국할 즈음 시중 여론은 윤석열과 송영길 가운데 누구를 더 가차 없이 혹독하게 나무라고 있을까. 결론은 이미 정해진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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