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청한 지난 주말 상춘객(賞春客)의 심정으로 대전으로 봄나들이에 나섰다.

주인공은 현 대전대학 체육과 처장으로 근무하는 한정훈 선배였다.

한정훈은 필자의 지도자 원년(元年)인 1989년부터 오늘이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인연을 맺은 복싱 인이다.

박창규 관리공단 육상 총감독 한정훈 체육처장 김왕순 처장(우측)
박창규 관리공단 육상 총감독 한정훈 체육처장 김왕순 처장(우측)

그때 그 시절엔 아마츄어 대회가 성남 실내체육관 과 강서구 화 곡 동 에 위치한 88체육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었다.

한정훈 처장을 보면 그때 만난 같은 20대 복싱지도자들인 곽귀근 정희조 고희룡등 선배들과 사각의 링에서 자웅(雌雄)을 겨루던 지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오늘의 스포츠 칼럼 주인공 한정훈은 1962년 6월 충남 대덕구 출신이다.

이 고장은 성균관대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 만해 한용운 선생과 더불어 삼절사(三節士)로 불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생지이다. 또한 1975년 방영된 TV 드라마 전우의 주인공 (故) 나시찬의 영화배우 김지미의 고향 이기도하다. 

1978년 계룡공고 신입생 한정훈은 대전 종합체육관에 입관 복싱을 수학한다. 그는 천부적으로 복싱의 4S(Speed.Skill.Sense.Strategy)를 고루 겸비한 반사신경이 탁월한 복서였다.

한정훈이 소속된 대전 종합체육관은 프로복싱 2체급 세계선수권자인 이열우 를 위시해 박일규 오인석 지택림 임영재 이상은 등을 배출한 체육관이다.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염동균을 비롯 송광식 양길모 김옥태 이형신 강민구 신우영 김수원을 배출한 전통의 한밭체육관(관장 이수남)과 70년대 대전 복싱의 양대산맥을 형성한 체육관이었다.

백현만을 RSC로 잡은 한정훈사단의 김민기
백현만을 RSC로 잡은 한정훈사단의 김민기

한정훈은 계룡공고 2학년 때인 1979년 10월 제60회 전국체육대회에 충남 대표(코크급)로 출전한다. 한정훈은 1회전에서 서울 대표 장관호와 격돌 판정승을 거둔다.

현재 프로복싱 WBA 국제심판으로 활약하고 있는 장관호(용인대) 바로 그분이다.

장관호는 1982년 대학선수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한 윤영환(동국대)을 꺽 은 복서였다. 한정훈은 준결승에서 부산 대표 김상찬(가야고)을 꺽고 결승에 진출한다.

좌측 2번째 한대화 전 한화감독 3번째 한정훈 차장.
좌측 2번째 한대화 전 한화감독 3번째 한정훈 차장.

제5회 김명복 박사배 최우수상을 받은 김상찬은 세계챔피언 장정구와 아마츄어 시절 1승 1패를 기록한 호적수였다.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제1회 한중 국가대항전에 학생대표로 출전한 김종옥(성남 성인고)이었다.

한정훈은 김종옥을 판정으로 잡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한정훈에 패한 김종옥은 1980년 제4회 김명복 박사 배 대회에서 허영모를 꺽 은 초고교급 복서였다.

그해 한정훈은 김명복배와 제30회 학생선수권을 우승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다.

묵직한 한방은 없지만 리드 미컬(Rhythmical) 한 스텝에서 뿜어내는 절묘한 카운터로 학원 스포츠를 평정한 것이다. 

1979년 12월 한정훈은 모스크바 올림픽 1차 선발전(라이트 플라이급)에 출전한다. 준결승 상대는 홍진호(수경사). 홍진호는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선수로 본선 1회전에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LF급 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북한의 이병욱과 맞대결 3ㅡ2로 분패한복서였다. 

최요삼을 꺽은 대전체고 출신 신은철 경기장면(좌측)
최요삼을 꺽은 대전체고 출신 신은철 경기장면(좌측)

26세의 국군 아저씨와 맞대결한 18세 소년 한정훈은 용호상박 난형난제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네임 벨류(Name value)에 밀려 판정으로 패한다.

하지만 경기내용을 분석한 협회의 추천으로 홍진호를 밀어내고 그는 올림픽 최종선발전에 나간다.

한정훈의 첫 상대는 1979년 제1회 세계청소년대회 은메달리스트인 홍동식(동아대).

그 대결에서 한정훈은 한 뼘 차이의 실력을 뒤집지 못하고 판정에 고개를 숙인다, 최종결승전에서 장흥민 (한국체대)은 홍동식을 판정으로 잡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반항아 기질로 무장한 한정훈은 우여곡절 끝에 계룡공고에서 1년 유급 대전 체고로 진학한다, 졸업반인 1981년 한정훈은 장수곤(청운실고). 최태영(예산 중앙고) 오종서(용인대) 윤승희(경희대) 등을 차례로 잡으며 1982년 한국체대에 진학한다.

한정훈은 전국체전에 4회 연속 결승에 진출하였지만 허영모에 연속해서 3연패를 당하는등 정상권에서 제동이 걸린다.

1987년 한정훈은 모교인 대전 체고에 강사로 입성  인생 2막이 펼쳐진다.

첫해부터 한정훈 사단의 대전체고는 황철순의 리라공고 이흥수의 서울체고 곽귀근의 경북체고와 용쟁호투를 펼치면서 4강을 형성한다. 

필자 최요삼 임계룡선수(좌측부터).
필자 최요삼 임계룡선수(좌측부터).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한 그는 최재기 최인수 이승언 김승석을 주축으로 시나브로 학원 스포츠를 잠식해 나간 것이다.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은 한정훈은 1989년엔 대전중구청을 1991년엔 대전대학을 연달아 창단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한다.

필자가 이끄는 용산공고는 한정훈 사단의 대전 체고와 1989년 6월 첫 대결을 펼쳤다.

용산공고 에이스 최요삼과 대전 체고의 신은철이 학생선수권 코크 급 준결승에서 맞대결을 최요삼이 고배를 마셨다.

그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3회전에서 신은철이 최요삼을 향해 마치 돌고래가 치솟는 듯한 역동적(力動的)인 라이트 어퍼컷을 때리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1992년 필자가 속한 용산공고에 임계룡(코크급)이란 복서가 있었다. 그는 공두환(군산고) 김창현(리라공고) 이장선 (홍천고)를 잡고 전국대회 2관왕을 차지한 파이터 였다.

어느날 한정훈 선배가 나에게 동생 계룡이 좀 <대전대>로 보내줘!! 하면서 정중하게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임계룡은 이미 동아대학에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1993년 잠실에서 대학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한정훈 감독과 격투기 황제 효드로(우측)
한정훈 감독과 격투기 황제 효드로(우측)

아이러니(irony)하게 한 감독이 원했던 동아대 임계룡의 첫 상대는 바로 대전대 강인용이었다. 한정훈 감독이 임계룡 대신 차선책으로 서울체고 강인용을 택한 것이다. 나는 현장에서 유심히 이 경기를 관찰했다.

무려 5차례 다운을 주고받는 격렬한 타격전 끝에 언더독 의 강인용이 탑독의 임계룡에 2회 RSC승을 거두며 반란을 일으켰다.

한정훈 감독에 의해 용산공고의 양쪽 날개(최요삼 임계룡)가 비상하지 못하고 추락한 것이다.

다행히 이 두 복서는 후에 세계챔피언과 올림픽 대표로 뽑혀 그때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달랬다.

1997년 서울체고에 입성한 필자는 당시 1학년인 코크급의 국나남을 조련 세계선수권자 이옥성(당시 경남체고) 킹스컵 금메달 홍무원(원주 대성고) 대통령배 최우수복서 정헌범(대전 동구청) 등을 상대로 5연승을 질주 전국대회 4관왕을 차지했다. 

한정훈 전 대전복싱 협회 장
한정훈 전 대전복싱 협회 장

국나남이 졸업반인 1999년 한정훈 감독이 나에게 또다시 스카웃을 요청한다.

그러나 난 또다시 거절했다. 국나남 역시 한국체대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천년 전국체전이 열렸다.

한국체대 1학년 국나남의 상대는 공교롭게도 이경렬 (대전대)이었다.

역시 이경기 역시 현장에서 직관했다. 결과는 한국체대 국나남이 대전대 이경렬에 판정패를 당했다.

경기에 패한 국나남은 큰 충격을 받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프로 전향 신인왕전에 출전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어 아쉬움을 달랬다. 2000년 도로 기억된다.

당시 김명복 박사 배 LM급 결승전에서 필자가 소속된 서울체고 서영민은 인천 계산공고 홍인기를 잡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때도 한 감독은 나에게 스카웃을 요청 했지만 서영민은 전년도 전국체전 준결승에서 고교 랭킹 1위 엄윤성(대구 성서공고)을 판정으로 잡고 한국체대행이 예약되어 있어 또다시 스카웃이 결렬되었다.

그때 한 감독은 나에게 차선책으로 서울체고 서영민에 패한 인천 계산공고 홍인기의 스카웃을 부탁했다.

당시 계산공고 복싱 강사인 임채동은 나와는 친숙한 후배 지도자였기에 그는 나의 요청에 군말 없이 승낙했다.

중요한 사실은 한국체대에 진학 별다른 성적을 창출하지못한 서영민에 반해 대전대학에 입학한 홍인기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잠재력을 폭팔 시켰다.

한 감독은 승부욕이 대단하다. 하다못해 술을 마시더라도 상대를 압도할 정도로 주도권(主導權)을 잡고 대작을 한다.

그는 복싱계에서 경북체고 곽귀근. 대구 성서공고 정희조. 리라공고 황철순. 서울체고 이흥수. 감독과 함께 학원 스포츠계를 쥐락펴락한 독수리 5형제였다.

한정훈의 손은 만지는 모두 것이 황금으로 변모시키는 일명 미다스(Midas Touch)손이다.

그의 손을 거쳐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신은철 김태규 백종섭 조세형을 비롯 서울컵 2연패를 달성한 고지수 그리고 김왕순 이재현 최진우 양현태 박재갑 장형욱 임재환 전인구 임현철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간판 복서들을 화수분처럼 쉼 없이 배출해냈다.

한정훈은 잡견(雜犬)을 진돗개로 재탄생 시킬 줄 아는 역량 있는 지도자이다.

한정훈과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이해정(우측)
한정훈과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이해정(우측)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1997년 대전 중구청 소속의 김민기가 전국체육대회에 슈퍼헤비급으로 출전 1995년 제4회 서울컵 슈퍼헤비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안정현(나주군청)과 1991년 호주 시드니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리스트인 채성배 (호남대)를 연파하고 결승에 올라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선수권을 각각 2연패를 달성하고 88서울올림픽 슈퍼 헤비급 에서 기념비적인 은메달을 획득한 백현만 마져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난타 4회 RSC로 꺽고 우승한 김민기의 경기장면을 압권(壓卷)의 경기로 꼽았다.

한국대표팀 코치 한국복싱협회 부회장을 거쳐 지난 2020년 대전 복싱협회 회장에 당선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한정훈 감독이 인생 3막에서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복싱계에 한 축을 견고하게 다지길 바란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