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불의에 맞서 매서운 죽비를 날린 ‘대쪽 언론인’

청암 송건호는 1953년 언론계에 발을 디딘 후 평생 반독재, 민주주의의 길을 걸었던 ‘대쪽 언론인’이자 시대의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수록한 시편 ‘송건호’에서 이렇게 썼다. “시대는 착실한 세대주를/ 지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속절없는 독서인을/ 거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조심스런 언론인을/ 역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 속에 등장하는 ‘지조의 사람’이야말로 언론인 송건호(1927~2001)를 표상하는 키워드다. 물론 그는 “남다른 성실성과 필력”(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술도 못 마시면서 산(山)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어 술자리에 마지막까지 앉아 있던” 사람(소설가 이호철)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송건호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역시 ‘대쪽 언론인’이다. 동아투위 위원장을 지낸 도서출판 다섯수레 김태진 대표(77·전 민주언론협의회 의장)는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꼿꼿함 그 자체”라고 했다.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청와대에서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들을 불러 식사를 하고 촌지를 돌린 적이 있다. 그때 유일하게 촌지를 거부했던 사람이 송 국장이었다.”

태어난 곳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비야골). 증조부 때 비야골에 정착한 중농의 집안에서 출생한 송건호는 1940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이때만 해도 소심하고 순응적인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평생토록 몰입했던 책읽기의 습관이 바로 이 무렵 길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역사비평’ 1집(1987)에 수록한 ‘분단 42년과 나의 독서편력’이라는 글에서 안국동과 본정동(지금의 충무로)을 헤매고 다니던 빡빡머리 학생의 ‘헌책방 순례기’를 고백하고 있다.

언론인 송건호의 사상적 지표였던 ‘민족주의적 휴머니즘’이 발아한 것은 더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그는 역사학자 서중석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이고 대동아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경성법학전문학교, 1948년에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로 편입)에 들어가니까 ‘반도인’이라고 차별을 해요. 그때서야 ‘우리는 일본 사람이 아니고 일본은 우리를 무시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내심 반항하기 시작했죠.”

언론계 입문은 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1953년,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입사하면서였다. 이듬해 조선일보 외신부로 자리를 옮겨 3년간 근무했고,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1960년부터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경향신문과의 인연은 1962년 시작됐다. 기존의 여러 기록에 1963년부터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근무했다고 쓰여 있는 경우들이 많으나, 실제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 ‘송건호 논설위원’이 등장하는 것은 1962년 11월8일자부터다. 경향신문 1면에 게재된 ‘개정헌법의 문제점’이라는 논설이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폐간됐던 경향신문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4월27일자 조간으로 복간한 이후,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던 일간지”(임경민, ‘푸른바위 송건호의 언론사’)였다. 또 송건호가 입사하던 무렵에 5·16 쿠데타 주역들은 민정이양 공약을 파기하고 집권 계획을 노골화하고 있었다. 당시 송건호는 논설 ‘개정헌법의 문제점’에서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자칫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이후 게재된 ‘정치활동과 파벌’(1963년 1월25일자)이라는 논설도 눈길을 끈다. 송건호는 “어느 나라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정치에 파쟁이 없는 나라는 없다”면서, ‘파벌’이라는 말만 나오면 즉각적으로 사색당쟁을 떠올리면서 소모적 싸움으로만 인식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전쟁 중에도 당쟁을 멈추지 않았던 영국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파벌을 오히려 정치적 기술로 선용(善用)해야 한다는 견해를 펼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신선하게 보일 정도다.

1963년 5월18일자 경향신문은 한국휴머니스트학회의 월례 강연회를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했는데, 당시 송건호 논설위원이 강사 3인에 포함돼 있다. 그에게 주어진 강연의 제목은 ‘민족주의와 휴머니즘’이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두 개의 화두가 언론인 송건호의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약 4년간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일해온 그는 1965년이 막을 내리던 12월31일, 38세의 나이에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그렇게 편집국장에 임명된 후에도 논설위원으로서 마지막 논설을 썼다. ‘토요논단’이라는 타이틀로 1966년 1월22일자에 게재한 ‘근대화의 문제점’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슬로건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통쾌한 논설이었다. “공화당이 조국의 근대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대중심리를 포착하는 데 캐치프레이즈적 역할을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정부 교서나 여당·야당의 기조연설까지도 모두 근대화 구호에만 빠져 있음을 질타하고 있다. 위정자들이 오로지 ‘공업화’를 근대화로 착각하는 상황을 꼬집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란 무엇인가를 차분한 논리로 주장한다. 개인의 각성에 기반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야말로 근대화의 핵심이라는 논지다. 서슬 퍼런 정권의 ‘국가적 시책’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끝내 할 말을 다했던 그의 논설은 이후 그가 겪어야 할 고난을 예고한다.

편집국장 재임기간은 짧았다. 1965년 12월31일부터 이듬해 4월30일까지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송건호 평전>에서 그의 편집국장 취임 일성이 “신문의 정도를 걷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국장에게 넘기라”였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언론을 일일이 간섭하던 그 시절에 송건호 국장이 신문 편집을 진두지휘하는 시간은 오래 가기 어려웠다. 당시 경향신문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박정희 정권은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해 3년형을 언도했고, 사장 석방을 조건으로 신문을 공매 처분하면서 반강제로 빼앗았다.

생전의 송건호는 저서 <한국현대언론사>에서 “1966년 언론계에서 일어난 커다란 사건은 ‘경향신문’ 공매 처분 사건”이라고 쓴 바 있거니와, 그 무렵에 본인 역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렇게 경향신문의 사주가 교체되면서 송건호 국장도 경향신문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김삼웅은 <송건호 평전>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송건호는 진보정론을 견지하던 경향신문이 권력에 의해 사주가 교체되는 등 압력을 받아 비틀거릴 때 생애 처음의 편집국장 자리에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5공 때까지 끊임없이 ‘관재수’에 시달리는 생활이 예고됐다. (…) 그는 짧은 국장 재임 시절 줄곧 외압에 맞섰는데 이때부터 권력의 표적이 되다시피했다. 순수한 소년 같기도 하고 어쩌면 샌님 같기도 한, 큰소리 한번 내지르는 법이 없을 것 같은 온순한 성격 어디에 그런 결기가 숨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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