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혜의 영화나들이] 흐릿한 화면 속 정처 없는 인물들

홍상수 감독의 29번째 장편영화 ‘물안에서’는 지난 2월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인 인카운터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월드프리미어로 상영된 영화다.

홍 감독은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도망친 여자'로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감독상을, '인트로덕션'으로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각본상을, '소설가의 영화'로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 대상을 각각 수상한 바 있다.

영화 '물안에서'의 한 장면
영화 '물안에서'의 한 장면

이번 ‘물안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 '인트로덕션', '소설가의 영화' '탑' 등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 신석호와 하성국,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춘 김승윤이 출연했으며, 2022년 4월에 제주도에서 6회차, 10일간 촬영됐다. 홍상수 감독의 오랜 연인 김민희는 제작실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목소리 출연을 했으며 극중 삽입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인 인카운터 부문은 실험적인 영화를 초청해서 상영하는 코너인데, ‘물안에서’는 61분 동안 물속에 갇혀 세상을 보듯 아웃포커스 촬영방식으로 촬영된 실험영화다.

‘물안에서’는 상영시간 61분 내내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다. 장면 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흐릿하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화면이 대부분이다. 초반 세 명의 등장인물이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는 거의 얼굴의 눈, 코, 입 형태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며 탁 트인 제주도의 풍경 역시  뿌옇게 스크린 위에 펼쳐질 뿐이다.

영화 '물안에서'의 주연배우 성모역의 하성국, 남희역의 김승윤, 상국역의 신석호
영화 '물안에서'의 주연배우 성모역의 하성국, 남희역의 김승윤, 상국역의 신석호

성모(신석호)는 배우 일을 하다가 자신에게 창조성이란 게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첫영화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대학을 함께 다닌 상국(하성국)과 남희(김승윤)에게 각각 촬영과 연기를 부탁한다. 

성모는 몇달 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이들에게 일주일간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며 영화를 찍을 계획이다. 세 사람은 바람이 많이 부는 섬의 민박집에 머문다. 세 사람은 민박집 주변을 거닐며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두 친구는 아직 내용을 떠올리지 못한 성모에게 영감이 찾아오기를 가만히 기다려준다. 그들은 그저 먹고, 걷고, 대화한다. 그러는 동안 화면의 초점은 점점 더 흐려지고, 흐릿한 화면 속 인물들은 정처 없다.

제73회 베를린영화제에서 '물안에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제73회 베를린영화제에서 '물안에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도입부에서는 그나마 잘 보였던 인물의 이목구비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형체를 잃어간다. 이후 성모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넓은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봉사활동에 감명받은 그는 결국 쓰레기를 줍는 여자를 내용으로 영화를 찍는다. 

인물들의 대사는 전작들에 비해 밀도가 낮다. 인물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제주도에 돌이 많고 바람이 많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아웃포커스된 화면 때문에 인물들의 표정이나 세세한 행동이 보이지 않고 대화도 밋밋하다. 물 안에서 흐릿하게 보는 느낌이다.

승모의 몇몇 말과 행동만은 또렷하게 다가온다. 승모는 왜 영화를 만드느냐는 질문에 “명예를 원하는 거지”라고 답한다. 홍상수 감독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영화 '물안에서'를 연출한 홍상수 감독과 제작실장 김민희
'영화 '물안에서'를 연출한 홍상수 감독과 제작실장 김민희

홍상수의 작업에 따르면 영화란 본디 자신이 대상으로 삼는 시간, 공간, 존재 등의 단일성을 보장할 수 없는 매체다.  그는 늘 다른 방법으로 영화가 직면한 곤란을 다뤄왔다. 그때문에 홍상수의 영화는 항상 기이하고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물 안에서’는 영화의 표면 자체를 물렁물렁하게 보이도록 한다. 픽셀은 뭉그러지며 뒤섞이고 관객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지 못 한다.

‘물 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웃포커스로 촬영된 영화로 초점이 인물이나 배경에 정확히 맞지 않아 프레임 전체가 뿌옇게 보인다. 우리가 인식하는 통상적 영화와 조금 다른 겉모양을 지녔다. 이야기를 궁금해 하기도 전에 온통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질감은 홍상수의 전작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영화 형식의 견고함을 건드린다. 

베를린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홍 감독은 “처음에는 아웃포커스 실험을 한다는 게 터무니 없게 생각됐는데 막상 카메라 뒤에 선 결정적인 순간에 아웃포커스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며 “선명한 이미지에 신물이 나기는 했다”고 말했다.

영화 '물안에서' 포스터
영화 '물안에서' 포스터

‘물안에서’가 베를린 월드프리미어 상영 후  외신 매체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Movie Marker는 "'물안에서'는 창조적 과정에 대한 승리의 송가다. 홍상수 감독은 여전히 그의 힘의 절정에 있지만, 그가 왜, 그리고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도달하게 됐는지 되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영혼에 좋은 음식이 될 것이다", 고 호평했다.

Journey into Cinema도 "'물안에서'는 사상과 예술적 효과의 매혹적인 결혼이고 예술 창작과 창작의 기법에 심취한 감독으로부터의 따뜻한 포옹이다"라 했고, Awards Watch도 "홍 감독의 제스처는 전체 동영상의 역사, 그리고 변화된 테크놀로지에 의해 악화되어 온 표현의 방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고 평했다.

Tone Glow는 ‘물안에서’는 수년간 만들어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대담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가장 에상하지 못한 개인적 영화이다. 홍감독에게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을 포착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고 절찬했다.

'물안에서'는 홍상수감독과 김민희의 12번째 협업작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로 처음 인연을 맺은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그 후'(2017), '클레어의 카메라'(2018), '풀잎들'(2018), '강변호텔'(2019), '도망친 여자'(2020), '인트로덕션'(2021), '당신 얼굴 앞에서'(2021,) '소설가의 영화'(2022), '탑'(2022) 등을 내놨다. 김민희는 배우이자 제작실장으로 매 작품 참여했고 '물안에서'는 제작실장이자 배우로 모두 이름을 올렸다.

주인공 승모가 물속으로 아련하게 사라지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물안에서’는 4월12일 (수)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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