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10월이 돌아왔다.

지난 추석을 겸한 6일간의 연휴 기간에 난 인천광역시 영종도를 찾아 그곳에서 두 명의 복서를 만났다.

주인공은 한국체대 81학번 5회 졸업생인 이성희와 용인대 79학번 서북수가 10월 첫 주의 스포츠칼럼 주인공이다.

5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송미가열과 결전을 펼치는 이성희(좌측)
5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송미가열과 결전을 펼치는 이성희(좌측)

두 사람은 서울체고 선후배지간으로 체고를 졸업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결속하면서 지내는 친밀한 관계다.

1960년 전북 남원 출신의 서북수는 서울체고 2학년에 때인 1977년 11월 개최된 제1회 김명복 배 학생대회에 라이트급으로 출전 결승진출의 골목에서 황정한 (신진공고)와 맞대결한다.

이대결 에서 사우스포인 서북수 는 황정한과 다운을 주고받는 타격전을 펼친 끝에 판정패를 당한다. 

황정한은 결승에서 김득구 (천호상전)에 3회 RSC 승을 거둔 공대식(부산 동의공고)과 맞대결 판정으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황정한은 1979년 뉴욕 월드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이후 프로로 돌아 1981년 10월 42전 35승(27KO) 7패를 기록한 동양 페더급 챔피언 로얄 고바야시에 1회 KO승을 거두고 정상에 올랐다.

서북수는 졸업반인 1978년 학원 스포츠를 평정한다. 그리고 성인무대를 정복하기 위해 킹스컵 선발전에 출전 LW급에서 경남대 김영진에게 한차례 다운을 탈취 하는등 원사이드한 경기를 펼친 끝에 판정승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국가대표 양설석 (경희대)이었다. 이 경기 에서 서북수는 비록 판정패 를 했지만 수준 높은 경기력을 인정받아 동국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그러나 입학을 목전에 둔 서북수는 동국대의 에이스 김정철이 1979년 1월 돌연 프로행을 선언하는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심기가 불편해진 동국 대학에서 서북수의 입학에 제동을 걸면서 서북수 의 동국대행은 좌절된다. 결국 서북수는 차선책으로 용인대학으로 방향 전환한다. 

1978년 킹스컵 선발전에서 경남대 김영진을 다운시키는 서북수.
1978년 킹스컵 선발전에서 경남대 김영진을 다운시키는 서북수.

그리고 대학 2학년 때인 1980년 1956년 멜버른 올림픽(밴텀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천 지도교수의 트레이닝을 받아 장족의 발전을 이루면서 웰터급에서 김명복배. 회장배. 학생선수권. 전국선수권을 차례로 재패 전국대회 4관왕의 금자탑을 쌓는다.

이 기록은 한국체대 경희대 동국대 동아대등 전통의 복싱 명문 학교와 맞대결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라 기쁨은 배가 되었다.

서북수는 대학재학시절 방학마다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가면 체육관 에 들려 자신과 같은 사우스포 복서 한 명을 기초부터 성실하게 지도를 해준다, 그가 바로 자신의 친동생과 남원 농고 동기인 1984년 LA 올림픽에서 복싱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신준섭이다. 

1980년 전국무대 4관왕을 달성한 용인대 서갑수(우측)
1980년 전국무대 4관왕을 달성한 용인대 서갑수(우측)

여담이지만 남원은 전통적으로 서북수를 포함 중량급에서 강세를 보였다.

1979년 제1회 월드컵대회 웰터급 동메달과 1980년 인도 봄베이 에서 개최된 제9회 아시아 선수권 미들급 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박영규 84년 LA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 1985년 서울 월드컵 미들급 동메달 황인도 새천년 고교무대 미들급을 평정한 한정남 (한국체대)등 유독 중량급에서 강세를 보인 고장이다.

각설하고 대학을 졸업한 서북수는 복싱을 접는다. 그리고 남원 출신의 3선 의원인 양창식 의원의 수행비서로 35년을 함께한다.

1930년 남원 출신의 양창식 의원은 육군사관학교(10기)를 나와 준장으로 예편한 3선 의원이었다. 

국가대표 출신의 강성덕과 경기를 펼치는 이성희(우측)
국가대표 출신의 강성덕과 경기를 펼치는 이성희(우측)

그는 양의원을 충직하게 보필 의(義)에 살고 의(義에 죽는 일관된 哲學(철학)을 몸소 실천 그에게 늘 푸른 소나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복싱인 특유의 겸손과 예절 바른 행동으로 거물급 정치인 양 의원의 신임을 듬뿍 받은 것이다. 그리고 양의원을 통해 자연스럽게 호남 향우회를 통해 당시 민정당 의원인 고건 총리를 소개받으며 인맥의 폭을 넓힌다.

전북 군산시 임피면이 원적지인 고건 총리는 선친이 서울대 철학과 교수 출신으로 김영삼 대통령 텔런트 이순재등 수많은 후학들을 가르킨 명망 높은 은사였다.

올곧은 성품을 인정받은 서북수는 1987년 고건 총리와의 추천으로 서울 시립 승화원 직원으로 채용되어 성실하게 근무한다, 그리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미장이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듯이 진급을 거듭한 서북수는 평직원으로 출발 꼭지점인 상조회사 승화원 운영과장에 임명된다.

그리고 2021년 33년을 근무하면서 61세에 명예롭게 퇴직을 한다. 현재 서북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시립 승화원에서 장례예식과 납골 의전 상담을 담당하면서 복싱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다. 

남원출신 국가대표 박영규(우측)의 경기장면.
남원출신 국가대표 박영규(우측)의 경기장면.

서북수의 서울체고 2년 후배인 이성희는 1961년 8월 서울태생으로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을 수학 1978년 서울체고에 입학한 복서다.

그해 전국 신인대회에 코크급으로 출전한다.  이성희는 동물적인 감각의 순발력과 민첩성으로 4연승(2KO)으로 결승에 선착 이윤희(목포 덕인고)와 한판승부를 벌여 접전 끝에 고배를 마신다, 그해 제59회 전국체전 서울 대표로 선발된 이성희는 1회전에서 전년도 전국체전 우승장인 송미가열(전북)과 용호상박 난형난제의 접전을 펼쳤지만 3ㅡ2 판정에 고개를 숙인다.

이후 부상으로 1년의 공백기를 맞이한 이성희는 졸업반인 1980년 7월 학생선수권대회에서 문성길(목포덕인고)을 잡고 올라온 경북 대표 정창구 에게 4강전에서 판정패 동메달에 머문다. 전열을 추스린 이성희는 그해 전국체전 선발전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한다. 

영종도 바닷가에서 이성희 부장 서북수 대표(우측)
영종도 바닷가에서 이성희 부장 서북수 대표(우측)

결승전 상대는 제4회 김명복배 우승자이자 플라이급 고교 랭킹 1위 김성길(숭덕공고)이었다. 이성희는 복싱 감각이 탁월한 김성길을 잡으며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다.

김성길은 제13회 킹스컵대회를 석권한 복서이자 변정일(동국대)을 2차례나 군말 없는 판정으로 잡은 국가대표 출신이었다. 그리고 대통령배 선발전 결승에서 국가대표 권채오(한국화약)를 꺽고 올라온 이현식 (신한체) 마져 5ㅡ0 판정으로 일축하고 본선행을 예약한다.

제61회 전국체전 2회전에서 이성희는 강성덕(경남)과 대결 치열한 각축전을 펼친 끝에 판정승을 거둔다, 1983년 로마 월드컵에 국가대표(페더급)으호 출전한 강성덕은 그해 대통령배 4강전에서 치악산 호랑이로 명성을 날리던 신창석을 무자비한 난타로 RSC승을 거둔 갈색의 폭격기 였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후에 1980년 케냐 대체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송광호(부산체고)를 잡고 대이변을 연출한 이승용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현식에 판정승을 거둔 이성희(우측)
이현식에 판정승을 거둔 이성희(우측)

언더독인 이성희는 탑독의 이승용을 맞이하여 반박자 빠른 시그니처(Signature)한 스트레이트로 홈링의 이승용을 완벽하게 제압하면서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전남 지역 예선에서 문성길에 3연승을 기록한 김창렬(순천 금당고). 이 경기에서 이성희는 판정패 소중한 은메달을 획득한다.

1981년 이성희는 복싱사관학교 한국체대에 제5기로 입학한다. 당시 동기생들은 이성희 포함 김종원 김창렬. 박권순 .전일선. 신귀항. 나동길. 이봉래. 이승용 이었다.

이 동기 멤버 들은 한국체대 복싱 역사상 단 한 명의 국가대표를 배출 하지 못한 약체 전력으로 기억된다.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킹스컵대회 밴텀급에서 우승한 김성길은 한국체대를 졸업한 후 상무에 입대 태극마크를 달았다. 참고로 한국체대 복싱 역사상 최강 전력을 보유한 기수는 허영모 안영수 이해정 진행범 이철승 송경섭이 포진된 공포의 83학번인 제7기다.

1981년 한국체대에 신입생으로 입학한 이성희는 제5회 김명복 박사배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한다. 그리고 파죽의 3연승을 질주하면서 결승에 선착한다.

결승전 상대는 부산체고 시절 송광호와 쌍두마차를 이루면서 케냐 대체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김명환이었다.

이 경기 에서도 이성희는 초접전을 펼치면서 호각세를 펼쳤지만 승리의 여신은 그를 외면해 버린다. 그 경기는 이성희 아마츄어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고질적인 어깨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36전 30승(7KO) 6패의 전적을 남기고 대학을 졸업한 이성희는 대전에서 사업을 하면서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사업에서 창출된 수익금 일부를 친분이 두터운 한 국체대 후배인 한정훈 감독이 사령탑으로 근무하는 대전대 복싱선수 김태규 백종섭 선수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는 선행을 배풀었다 

한국체대 5회 졸업생중 유일한 국가대표로 선발된 킹스컵 금메달 김성길
한국체대 5회 졸업생중 유일한 국가대표로 선발된 킹스컵 금메달 김성길

양 선수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 이성희 대표의 후원에 화답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성희는 사업을 하면서 재능기부형식으로 대전 대산 체육 중학교팀을 창단 5년간 근무하면서 전국 신인대회에서 4체급을 석권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회장배 대회에서는 금2 은2 동1 을 획득 종합 준우승을 차지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여기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자신의 모교인 서울체고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때가 생의 정점에서 가장 가슴이 뿌듯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금은 인천시 영종도 에 위치한 건설업체에서 부장으로 근무한 이성희는  바닷가를 배경 삼아 만찬을 함께하면서 지난 추억을 회상했다.

인생 3막까지 한번 맺은 인연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삶의 종착역까지 동행하는 두 사람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번 주 스포츠칼럼을 마무리한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조영섭 칼럼니스트
조영섭 복싱전문 칼럼니스트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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